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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 ─ 아즈마 히로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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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 May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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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선유민



근대 〈서브컬쳐 소비〉 누락의 은폐


다시 검토해 봅시다. ① 근대 → ② 과도기 (이야기 소비의 시대) → ③ 포스트모던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시대) 의 3단계가 아즈마 히로키의 사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1〉은 근대와 포스트모던을, 〈그림5〉는 근대를 생략하고 과도기와 포스트모던만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즈마 히로키는 본래 대응하지 않는 두 그림이 대응하고 있다고 서술했죠.

〈그림1〉에서 과도기를 생략하고 있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야기 소비에 '수정'을 가하고 과도기를 추가하기 이전에는 ① 근대 → ③ 포스트모던 의 2단계 사관이었던 데다, 세 단계 중 한 단계를 생략하고 설명한다면 보통은 과도기를 생략할 것입니다. 기간으로 따져봐도 과도기는 고작해야 10년 남짓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고요.

문제는 〈그림5〉입니다. 이쪽은 근대를 나타내는 부분이 통째로 빠져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그림1〉은 각 시대의 '세계상'을 〈그림5〉는 각 시대의 '이야기(허구) 소비 방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소비 방식의 변천을 통해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환을 논한 책인데, 어째서 근대인이 허구를 소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그림이 누락되어 있는 걸까요?

앞서 인용했던 부분을 다시 살펴봅시다.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우리의 세계상은 이야기적이고 영화적인 세계시선에 의해 지탱되던 것에서 데이터베이스적이고 인터페이스적인 검색엔진에 의해 읽어내어지는 것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일본의 오타쿠들은 70년대에는 커다란 이야기를 잃어버렸고, 80년대에는 그 잃어버린 커다란 이야기를 날조하는 단계(이야기 소비)에 이르렀으며, 계속되는 90년대에는 그 날조의 필요성조차 폐기하고 단순히 데이터베이스를 욕망하는 단계(데이터베이스 소비)를 맞이했다. 오쓰카의 평론과 필자의 관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흐름이다. 이야기 소비와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구조는 그림5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림5a와 그림5b 두 그림은 각각 앞에서 나온 그림1a와 그림1b에 대응한다.  (p.97)


80년대와 90년대에 대해서는 오타쿠가 서브컬쳐를 소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0년대에는 커다란 이야기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설명은 사회 전반에 관한 이야기로, 소비 방식과는 별 관계가 없는 내용입니다. 문맥상 서브컬쳐의 소비 방식을 열거하는 부분에서, 근대에 관한 설명만은 전혀 대구를 이루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① 근대 → ② 과도기 (이야기 소비의 시대) → ③ 포스트모던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시대)의 세 단계 중 과도기와 포스트모던 시기의 서브컬쳐 소비는 각각 '이야기 소비'와 '데이터베이스 소비'라는 이름이 붙어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소비는 건담,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에반게리온과 같은, 각각의 소비를 대표하는 작품명도 거론되고 있는 반면, 근대에 관해서는 모두 결여되어 있습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에 이르는 흐름을 조망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이야기 소비와 데이터베이스 소비에 그러했듯,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 방식에도 어느 정도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정상일 테죠. 하지만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정면에서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 방식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왜인지 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명백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문맥상 근대의 소비 방식에 대해 논해야 할 부분에서도 '근대'라는 시대 자체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로 논점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오쓰카에 따르면 오타쿠계 문화에서 개개의 작품은 그 '커다란 이야기'의 입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소비자가 진정으로 평가하고 구매하는 것은 설정이나 세계관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설정이나 세계관을 그대로 작품으로 팔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실제 상품은 '커다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편인 '작은 이야기'가 겉보기 상품으로 팔리는 이중전략이 유효하게 된다. 오쓰카는 이 상황을 '이야기 소비'라고 했다. 2차창작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범람은 그 당연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적은 사실 서브컬쳐의 상황분석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던의 원리론으로서도 시사적이다. 여기서 간단히 설명해두자면, 포스트모던이 도래하기 전의, 커다란 이야기가 기능한 근대란 대개 그림1a 같은 트리 모델(투사 모델)로 세계가 파악되고 있던 시대이다. 한편에는 우리의 의식에 비치는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근대에서는 그 심층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되었다.  (p.67~68)


앞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근대와 포스트모던의 세계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이야기 소비와 그림 1b의 '포스트모던의 세계상(데이터베이스 모델)'을 대응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는 그림 1a의 '근대의 세계상(트리 모델)'에 대응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즈마는 근대의 '학문의 목적'에 관하여 이야기를 돌리고,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어떻게 보더라도 위화감이 들죠. 아즈마가 논점을 회피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가능한 한 논점을 회피하려 애썼지만, 책의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를 설명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맥락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서브컬쳐 소비와 대비시켜 설명해야만 하는 부분이 몇 곳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 부분을 고려하면 더 큰 문제가 부상하게 됩니다.


필자는 앞으로 작은 이야기의 배후에 있으면서 결코 이야기성을 갖지 않는 이 영역을 오쓰카의 '커다란 이야기'와 대비시켜 '커다란 비非이야기'라 부르고 싶다. 〈에반게리온〉의 소비자 대부분은 완성된 애니메이션을 작품으로 감상하는(종래의 소비) 것도, 〈건담〉처럼 그 배후에 감춰진 세계관을 소비하는(이야기 소비)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정보=비이야기만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p.80)

필자의 생각으로 여기에는 스노비즘과 허구의 시대가 끝나고 데이터베이스 모델이 우세해진 시대의 주체형성 양식이 문화소비의 구조를 통해 매우 알기 쉽게 나타나 있다. 근대의 인간들은 작은 이야기에서 큰 이야기로 거슬러올라갔다.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는 시기의 사람들은 이 양자를 연결하기 위해 스노비즘을 필요로 했다. (p.144~145)


이건 이상합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설명은 살짝 엇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로 뒤집혀 있습니다. 먼저 아즈마는 종래의 소비에서는 "완성된 애니메이션을 작품으로 감상"한다고 말했습니다. 대구가 맞도록 여기서 감상을 소비로 치환하면, 아즈마의 이 말은 근대인들이 '커다란 이야기'와 관련 없이 소박하게 작품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반면에 아즈마는 뒤로 가서, 근대의 인간들은 작은 이야기에서 커다란 이야기로 거슬러올라가는 식으로 픽션(작은 이야기)을 소비했다고 말을 바꿉니다. 요컨대,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최대한 근대 서브컬쳐 소비의 설명을 피하고 있을 뿐더러, 어쩔 수 없이 근대 서브컬쳐 소비를 언급한 부분에선 앞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 아즈마는 근대 서브컬쳐 소비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죠.



아즈마 히로키가 은폐해야 했던 것


아즈마 히로키는 어째서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를 은폐해야 했을까요? 야마카와 켄이치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전에 쓴 일부 텍스트를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야마카와 켄이치는 먼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간행 전년에 문예지에 게재된 『오상황론(誤状況論)』 제4회 연재분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원형이 되는 아이디어를 논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예의 3단계 사관도 등장하고 있었는데,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기서 아즈마가 근대 소비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점입니다.


근대적인 패러다임 속에 있는 독자는 복수의 작품으로부터 '작가'나 '사회 상황', 혹은 '진정한 이야기'라고 하는 커다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를 읽고 거기서, 미시마의 나르시시즘에서 1970년 전후의 일본을 뒤덮고 있던 정치적 어려움을,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죽음을 결의한 미시마가 구상하고 있던 신화적 비전에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타입의 읽는 법이다.  (p.548)


(아즈마 히로키, 「오상황론」, 『문학 환경 논집』, 야마카와 켄이치에게서 재인용)


그렇다면 아즈마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오상황론』에서와 같이 쓰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요? 야마카와는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도기와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모두 오타쿠 컬쳐의 작품을 예시로 들었는데, 근대에 국한해서만 미시마 유키오 같은 '문학'을 예시로 들 수는 없었다는 것이죠. 만약 아즈마 히로키가 그랬더라면 독자 대부분은 당연히 '어째서 근대 소비의 예시만 문학이야?'하는 의문을 품었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다른 시기에 관하여 모두 서브컬쳐의 소비 방식을 보여줬듯, 근대에 관해서도 근대 서브컬쳐 소비 방식을 다루는 것이 이치에 맞았을 겁니다. 말하자면, 과도기의 예시로 삼았던 건담보다 더 오래된 애니메이션을 근대의 예시로 삼는 것이 적절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로서는 이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건담 이전의 애니메이션, 예를 들어 '마징가Z'와 '황금 박쥐'는 커다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을까요?

야마카와 켄이치는 사실 아즈마 히로키 자신이 건담 이전의 애니메이션에 대해 말했던 에세이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오상황론』보다 더 이전, 1997년의 『오타쿠에게서 멀리 떨어져(オタクから遠く離れて)』가 바로 그것이죠. 여기에서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야마토'의 매력에 대해 물을 때, 사람은 '야마토'를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것은 본질적으로 신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담'은 토미노 요시유키라는 작가의 이름이 지금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중략) 즉, 이 두 작품 (주: 야마토와 건담)의 사이에도 큰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78~9년의 직전에, 애니메이션에 작가성이 태어났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작가의 '메시지', '표현'이라는 생각도 태어났다. (중략) 그것은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의 모던화, 근대화입니다. (p.239~240)


(아즈마 히로키, 「오타쿠에게서 멀리 떨어져」, 『우편적 불안들#』, 야마카와 켄이치에게서 재인용.)


놀랍게도 아즈마 히로키는 과도기 '이야기 소비'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 퍼스트 건담이 제작된 79년 즈음하여 '작가성'이 태어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재차 인용하자면, 아즈마 히로키의 포스트모던론은 다음과 같은 질문, 혹은 전제를 통하여 성립하고 있습니다.


(1) 포스트모던에서는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소멸하고 시뮬라크르가 증가한다. 그렇다면 그 시뮬라크르는 어떻게 증가하는 것일까? 근대에서 오리지널을 창출하는 것이 '작가'였더라면, 포스트모던에서 시뮬라크르를 창출하는 것은 무엇일까?  (p.62)


야마카와 켄이치는 『오타쿠에게서 멀리 떨어져』라는 에세이에는 또 하나 재밌는 구석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즈마는 해당 에세이에서 1979년 퍼스트 건담 무렵에 성립한 애니메이션의 작가성, 테마성이 1984년 '마크로스'에서 붕괴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즈마에 의하면 '마크로스'는 "어떻게 하면 미소녀를 등장시키고 어떻게하면 러브코미디와 우주 전쟁을 중첩시킬 수 있을까, 그 요청에서 만들어진 엉망진창의 설정과 이야기"만을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메시지는 변변치 않고, 작가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즈마는 '마크로스' 이후의 제작자는 오타쿠에게 인기 있는 요소를 과거의 작품에서 '인용'하거나 '리믹스'해서 창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죠.

아즈마 히로키의 이러한 시각이 옳은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즈마의 이러한 시각이 79년도 이후에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일치하지만, 79년 이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죠. 말하자면, 작가성 및 테마성은 70년대에 상승하였고, 79년에서 84년 사이에 피크를 맞이한 이후에는 하강하기 때문에 산형(山形)의 그래프를 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형그래프.png


아즈마 히로키는 '픽션의 작가성과 테마성이 퇴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근대의 종언을 증거하는 것이다'는 자신의 포스트모던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성립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과도기로 설정된 80년대 이후만을 검토하는 트릭을 구사하게 된 것이죠. 아즈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리지널의 오리지널로서의 불가사의한 매력, 그것은 현대사상에서는 종종 '작가성의 신화' 등으로 불려왔다. 80년대에서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는 오타쿠계 문화의 변천을 개관하는 한, 이 영역에서도 그러한 신화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작가는 몇 명이나 들 수 있지만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면 곤란해지는 것이 전문가뿐 아니라 독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p.110)


야마카와 켄이치는 마지막으로, 근대 소비에 대해 경우에 따라 다르게 말해서 속일 필요없이, '커다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소비했다고만 말해도 좋았을 것을 왜 아즈마는 "완성된 애니메이션을 작품으로 감상"했다는 모순된 이야기를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팠는지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해당 파트에서 아즈마는 건담과 에반게리온 같은 애니메이션 작품을 직접적으로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었죠. 때문에 독자가 퍼스트 건담 이전의 작품들이 '커다란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갖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야마카와 켄이치는 지금까지 살펴본, 3단계의 사관을 2단계로 압축하여 설명하거나, 이야기 소비가 근대에 적용되었다 포스트모던에 적용되었다 하는 트릭은 건담 이전의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고안된 것들이라고 정리하며, 이렇게 치졸한 트릭을 써온 아즈마 히로키가 논단의 거물처럼 행세해온 것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합니다.



한 가지 남는 의문


야마카와 켄이치가 아즈마 히로키의 교묘한 언설을 추적하여, 그 진상을 밝혀내는 성취를 거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다만 야마카와 켄이치의 논의에서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발견됩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오오츠카 에이지의 선행 논의에 기대어 성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오츠카도 아즈마와 같이 무언가 트릭을 사용한 것일까요? 아니면 아즈마는 오오츠카의 선행 논의에 기대었기에 구태여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야마카와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에 그에게서 답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널리즘의 장에서 아카데미즘의 장으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은폐하고 있는 보다 치명적인 사실을 미디어 평론가 아라이 카츠야를 참조하여 풀어가겠습니다.



《트릭스터 ─ 아즈마 히로키 (04)》에서 계속




Writer

선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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