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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의 커뮤니케이션 ─2차창작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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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47 May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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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선유민



이야기는 아즈마 히로키에서 시작합니다. 평론가 아라이 카츠야는 아즈마 히로키가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죠. 여기서 본질주의란 사회구축주의(사회구성주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데올로기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들이 개개인의 욕구에 바탕하여 동물적, 혹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소비한다고 여겼는데, 이런 관점이 바로 본질주의적인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사람들은 동물화한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 10년간 오타쿠들은 급속하게 동물화하고 있다. 그 근거로 그들의 문화소비가 커다란 이야기에 의한 의미 부여만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요소의 조합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성가신 인간관계에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모에 요소를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로 연출해주는 작품을 찾고 있는 것이다.  (p.159~160)

그러나 지금은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은 오히려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는 더이상 커다란 공감 따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다.  (p.164~165)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문학동네.)


아즈마 히로키가 취한 본질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오타쿠는 '동물적인 욕구'에 의해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행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인간과 달리 비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즈마 히로키가 본질주의적인 관점과 정반대의 위치에 자리하는 사회구축주의적인 관점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모순입니다. 이것은 그가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타카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죠.

무라카미 타카시는 62년생으로 오타쿠라면 제1세대에 해당합니다. 그는 애니메이션이나 피규어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완전한 오타쿠가 되지 못한 오타쿠'를 자칭합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DOB〉연작이나 〈S · M · P · ko2〉 연작에서 보듯, 무라카미 타카시가 오타쿠 컬쳐에서 독특한 발달을 이룬 캐릭터 디자인에 주목하여 그 특징을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강조하고 해체하고 변형함으로써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즈마는 무라카미가 오타쿠들에게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무라카미가 작업하는 데 협력했던 아사노 마사히코가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 유전자'가 결여되어 있다고 발언했던 것을 일례로 듭니다. 그리고 아사노 마사히코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계 작품을 '오타쿠적'이게 하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으리라 추측하죠.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다른 오타쿠들과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타카시 역시 시뮬라크르(≒개개의 작품)에서 '요소의 추출'을 행하는 것은 같습니다.


본래 현대미술의 비평적인 세계에서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은 '새로운 전위를 구성하기 위한 무기'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리고 필시 무라카미 또한 당초에는 오타쿠계 문화의 표층에 대해 그와 같은 '전위'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맥에서 이해하면 〈DOB〉나 〈S · M · P · ko2〉는 확실히 오타쿠적인 디자인이 가진 가장 과격하면서도 무근거한 부분을 추출해 순수화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며 그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p.114)


다만 다른 점은, 무라카미의 실험은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문에 시뮬라크르에서 "모에 요소를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아즈마 히로키는 무라카미의 실험이 "불완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진단하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을 이야기하며 오타쿠는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처리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상 오타쿠들은 서로 간에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시뮬라크르에서 모에 요소를 파악하는 공동의 능력을 갖추는, 일종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타쿠의 서브컬쳐 소비는 단순히 개개인의 '동물적인 욕구', '본능적인 감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창작과 소비의 순환 작용을 통하여, 공동체의 공동성을 지향하는, 사회적인 구축물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이터베이스가 (장르를 향유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암시하는) '장르적 관습'의 일부분인 이상 당연한 결론으로, 2차창작을 통한 개개의 작품군이 (본래의 뜻과 달라졌다고 지적되기도 하는) '장르'를 이루는 것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인'이라 불리는 공동체의 성원들이 별 수익을 거둘 수 없음에도(때로는 적자를 감수하며) 2차창작품을 발표 및 판매하는 '온리전'과 같은 행사를 열어, 커뮤니케이션의 장소를 만드는 것. 그리고 2차창작품의 판매와 구매를 통하여 애정과 열기를 공유하는 '공감'의 존재. 이것들은 오타쿠가 비오타쿠(리얼충)와 달리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말하는) 콘텍트보다 콘텐츠를 중시한 소통을 행하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접속의 밀도'를 중시하는 부류와 '전언(傳言)의 밀도'를 중시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는 것이죠.

또한 이런 관점을 도입하면 오타쿠 컬쳐에서 2차창작이나 작품 감상문 같은 유저 콘텐츠의 제작이 유난히 활성화된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2차창작은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일종의 종교 행위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식의 관점은 오타쿠 컬쳐를 얕게나마 알고 있는 외부인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죠. 이와 같은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점은, 종교 행위라고는 해도 사실 신앙 자체보다는 교회를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일을 중시하는 종교인이 많듯이, 2차창작에서도 마찬가지란 점입니다. 여기서 신앙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가 되며, 2차창작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2차창작물을 창작하고 소비하는 행위는 특정 콘텍스트(≒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에 소속되는 행위입니다. 다만 이러한 소속의 지속성은 갈수록 떨어져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공동체가 굳건한 신앙을 이유로 모이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모이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위터와 같은 SNS의 발달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이고 연결되는 것이 쉬운 환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겠죠.

이 점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카니발이나 마츠리와 같이, '축제'라고 형용하는 것이 적확할 단기간의 2차창작 붐입니다. 처음 시발점이 되는 땔감(원작)이 던져지면, 불이 급격하게 번져가며 축제가 확산되고 공동체가 확산하게 되는데, 여기서 '불'은 열기를 띤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차창작은 축제에 있어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해나갈 수 있도록 땔감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죠. 당연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지속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순식간에 타올라 재만을 남기고 공동체는 거품처럼 와해되기 마련이죠.

전언(메시지)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두 키워드를 창작 전반에 적용하면 더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이야기'란 단어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라는 뜻과 줄거리를 가진 '서사'라는 뜻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야기라는 이름의 커뮤니케이션 작용에서 그 내용이 얼마나 고도로 모델화, 추상화되었냐는 차이만 존재할 뿐, 줄거리를 가진 서사 역시도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으로 포섭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앞서 2차창작을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죠.

그리고 이것은, 이야기 창작(=커뮤니케이션)의 목적에 따라 창작자가 1차창작과 2차창작 중 한 가지를 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자면, 작가로서 전언(메시지) 자체를 중시한다면 1차창작을, 전언을 주고 받음으로써 성립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면 2차창작을 택하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이런 식의 구분에서는 금전적인 목적, 바꿔 말하자면 외발적인 동기로 창작을 하게 되는 케이스는 논외입니다.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이러한 식으로 1차창작과 2차창작을 구분하는 것은 아마도 상업적인 '양지'와 비상업적인 '음지'로 이원화된 오타쿠 컬쳐의 특수한 상황에 국한되어 가능한 구분일 것이란 점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오타쿠 컬쳐에서 2차창작을 하는 감각과 '인터넷 소설/휴대폰 소설'을 창작하는 감각은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휴대폰 소설이란 말이 낯설 수 있습니다. 휴대폰 소설은 일본에서 발달한 장르이기 때문인데, 여러 점에서 귀여니로 대표되는 한국의 인터넷 소설과 유사한 특징을 보입니다. 다른 것은 창작 · 유통 · 소비되는 매체가 휴대폰이었다는 것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런데 바로 이 휴대폰 소설은 다음과 같은 점이 주목됩니다.


최근 일본문학계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을 꼽으라면, 단연 '케이따이소설(携帶小説)', 즉 휴대전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이 소설의 성공이 문학계에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 소설들의 내용이 하나같이 소녀들이 실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경험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이들 소설이 '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즉 거의 대부분의 케이따이소설이 자기 체험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케이따이소설상 심사위원을 맡았던 한 평론가는 이를 두고 "궁극의 사소설"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작가를 만나보면 열이면 열, 소설 속의 주인공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중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p.99)


(김항, 『21세기 일본소설의 경계와 탈경계』, 창작과 비평 2008 - 여름호.)


평론가 사사키 도시나오는 휴대폰 소설가 대부분이 지방의 로드사이드(도로변)에 살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사사키 도나시오가 취재한 어떤 20대 여성 작가는 도호쿠 지방 도시 외곽의 공장, 주택, 밭이 어우러진 지역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자신은 근처 쇼핑몰의 패션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는 것이 매일의 일상인 여성이었죠.

그녀는 사사키가 "출근할 때 도로변에 맥도널드나 유니클로가 있지 않나요?"라고 묻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제가 살고 있는 곳에 온 적이 있으신가요?"하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일본 전국적으로 비슷한 로드사이드가 펼쳐져 있는 것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국적으로 비슷한 로드사이드가 펼쳐지고 있다는 인식이 별로 없이, 자기 주위의 미니멀한 현실을 그녀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소설이 팔리면 프로 작가가 될 것이라는 욕심은 전혀 없고, 단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가끔씩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을 쓸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사사키 도시나오는 이를 두고 로드사이드 문화의 특징이라고 풀이합니다. 사사키에 따르면 로드사이드 문화는 꿈과 희망과는 거리가 멉니다. 항상 장래에 대한 불안이 떠나지 않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일할 곳이 없고, 장래에 뭔가를 하고 싶다는 꿈도 없습니다. 주위의 동급생이나 선배, 후배 대부분이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유지하는 프리터이고, 사귀고 있는 친구도 프리터인 것이 보통이죠.

사사키 도시나오는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롤 모델은커녕, 존경할 만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듬성듬성 밭과 공장이 보이고, 도로변을 따라 편의점 같은 가게가 서 있을 뿐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화려한 도시 생활과 자신과는 전혀 인연이 없어보이는 곳,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바로 휴대폰 소설의 주된 작가층이자 독자층입니다.

말하자면, 오타쿠들이 원작의 이야기(콘텍스트)를 공유함으로써 만들어진 공동체에서 각자 2차창작을 통해 이야기를 발신하고 수신하는 것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킨다면, 휴대폰 소설의 향유 집단은 지방의 로드사이드라는 이야기(콘텍스트)를 공유하며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 수신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서로 깊이 연결되고 싶어', '사회와 연결되어서 안심하고 싶어'란 강렬한 사회적 갈망이 깔려 있는 것이죠. 여기서 전언(메시지) 자체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수신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죠.

따라서 오늘날 오타쿠 컬쳐에서 2차창작이 범람하는 것은 작가성의 실종을 가리키는 현상이 아닙니다. 다만 환경의 변화로 자신의 창작물을 타인에게 도달하도록 하는 일이 쉬워졌기에, 과거라면 창작을 하지 않았을 타입의 사람들까지 창작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타입의 창작자들은 본래 커뮤니케이션이 목적이기에 (1차창작자가 타인을 자신의 콘텍스트로 포섭하려는 것과 달리) 서로 공유하고 있는 콘텍스트 하에서 원작의 전언(메시지)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편리하게 가져다쓰고 있다는 것. 이것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보다 올바른 설명일 것입니다. 1차 창작자와 2차 창작자는 서로 간에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죠. 또한 이것은 아즈마 히로키가 오타쿠를 '사회성을 결여한 동물'이라고 본 관점이 지극히 자의적이고 편향적인 관점이었단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了)




참고 문헌


新井克弥, 「わが国における〈物語論〉の受容」, 関東学院大学文学部 紀要 第117号, 2009.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문학동네, 2007.

김항, 「21세기 일본소설의 경계와 탈경계」, 계간 창작과 비평 140호, 2008.

사사키 도시나오, 『전자책의 충격』, 한석주,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0.


  *  *  *


「트릭스터 ─ 아즈마 히로키」를 작성하던 도중에 논점을 벗어난 논의를 별도로 빼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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