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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 ─ 아즈마 히로키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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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0 May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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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선유민



규약의 부재, 총체성의 부재


재차 확인합시다. 비록 그 새로움에 현혹되기 쉽지만, 데이터베이스가 세계상에 위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그저 이야기의 '장르적 관습'을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야기(서사)와 캐릭터(그림)의 '장르적 관습'에서 규약(코드)에 대한 내용을 배제하고,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구체화 및 세련화한 결과가 바로 '데이터베이스'라는 키워드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들 요소가 각각 특정한 기원과 배경을 가지고 소비자의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 독특한 발전을 이룬 장르적인 존재라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그것은 단순한 페티시와는 달리 시장 원리 속에서 떠오른 기호이다. (중략) 모에 요소의 대부분은 그래피컬한 것이지만, 그 밖에도 특정한 말버릇, 설정, 이야기의 유형적 전개, 혹은 피규어의 특정한 곡선 등 장르에 따라 여러 가지가 모에 요소가 되어 있다.  (p.84~85)

세이료인의 소설이 구루마다 마사미의 베스트셀러 『세인트 세이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세계는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붐이었던 신본격 미스터리의 축적으로부터 여러 가지 요소를 추출해 자유롭게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독자도 또한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한다. 수십 건의 밀실살인이나 십수 명의 탐정이 계속 나뉘어 묘사되고 독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허용하는 현상은 세이료인이 읽히는 시장에서 탐정 상像이나 트릭이나 해결방법이 모두 모에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장르의 조건에 대한 이와 같은 자기 언급 의식은 아야쓰지 유키토나 노리즈키 린타로 같은 선행 세대가 지향한 바가 계승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선행 세대의 의식이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의 규칙(코드)을 향해 있는 데 비해, 세이료인의 의식은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를 향해 있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p.101~102)


장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서 행할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서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아즈마 히로키 자신도 언급한 장르의 '규약(코드)'은 잠깐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죠. 

규약은 언어학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규약은,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나 언어 행위가 서로 간에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약속에 의해 가능해지며 그것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념이죠. 서사학에서는 해당 개념을 빌려와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와 독자 간에 공유할 필요가 있는 공통의 약속을 일컬어 규약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는 흔히 말하는 '장르 문법', '서사 문법'을 구성하는 것이 곧 규약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괜찮습니다.

또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점은, 결국 데이터베이스의 '요소'란 장르에서 발견되는 인지 가능한 최소 성분, 말하자면 '패턴'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오츠카 에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죠.


데쓰카(*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의 만화를 '기호'라고 한다. 기호란 '패턴'이요, 자신이 그리는 그림은 패턴과 패턴의 조합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패턴이란 만화 제작 기술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그의 만화 입문서 『만화 전과』에서 그림1과 함께 패턴에 관한 설명을 한다. (중략) 지금까지 글을 읽고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책과 그의 글들을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애니메이션 〈디지캐럿〉의 주인공 데지코를 예로 들면서 "현재 '캐릭터'라 불리는 것들은 이미 등록된 요소들을 조합하여 작품별 프로그램에 따라 만들어지는 일종의 출력 결과라고 보는 편이 옳다"고 했다. 저자의 이 같은 해석은 데쓰카의 만화 기호설과도 맥을 같이한다. (중략) 그러므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읽고 오늘날의 오타쿠 표현은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새로운 요소'만을 뽑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이라느니 현대적이라느니 하고 단순하게 풀이해선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중세 이야기꾼들에 의한 이야기나 근세의 가부키, 그리고 패전 후의 만화 등 각 시대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데이터베이스에서 끄집어 낸 것, 즉 이미 존재하는 패턴의 조합이었다.  (p.65~82)


(오오츠카 에이지, 『캐릭터 소설 쓰는 법』, 김성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5.)


아즈마 히로키가 '규약(코드)'에 관한 내용을 배제하고 논의를 성립시킨 이상 똑같지는 않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장르의 클리셰, 특히 모티프(화소[話素])와 같은 기존 장르론에서 말하는 '패턴'과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모에 요소'라는 패턴은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 속에서 총체성을 이루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데서 결국 같습니다.

물론 개개의 요소에 대한 선호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호는 음식 재료에 대한 선호와 같은 것이죠. 완성된 요리가 어떤 형태고 어떤 맛이냐는 같은 재료(요소)와 레시피(코드)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요리사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 문제니까요. 이야기도 요리와 같이 '완성품', 말하자면 '총체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는 바로 이 총체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요리를 만들기 위한 레시피라 할 수 있는 규약을 배제하고 논의를 전개하죠. 가령 아즈마는 데지코라는 캐릭터가 여러 파츠(모에 요소)의 결합(조합)을 통하여 성립하였다고 말하는데, 아즈마는 창작자가 조합을 어떻게 한 것이고, 데지코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하나의 총체성을 띤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제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로 이름 지어진『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인데, 거기서 그는 데이터베이스 소비 이론에서 말하는 (요소의 조합에 불과한) '캐릭터'와 상반된 이토우 코우의 (총체성을 띤) '캐라' 개념을 빌려와 접합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모순을 가립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토우 코우의 논의를 참조하면서도 그가 제시한 '캐릭터/캐라'의 구분법을 무화(無化)하여 개념을 엄밀하게 다루는 일을 회피한 것이죠. 그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논한 '캐릭터 데이터베이스'의 단초는 사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후속권에서 회피했던 문제가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타쿠들은 우선 작품을 소비하고 때로 그것에 감동한다. 그러나 실은 그 작품이 시뮬라크르이며 그 실체는 캐릭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음으로 그들은 캐릭터를 소비하고 때로 거기에 '열광한다'. 그러나 실은 그 캐릭터도 또한 시뮬라크르이며 그 실체는 모에 요소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디지캐럿〉은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오타쿠들의 이와 같은 이중화(삼중화?)된 의식에 가장 자각적으로 만들어진 기획이다.

따라서 〈디지캐럿〉을 소비하는 것은 단순히 작품(작은 이야기)이나 그 배후에 있는 세계관(커다란 이야기), 나아가서는 설정이나 캐릭터(커다란 비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층에 있는 보다 광대한 오타쿠계 문화 전체의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앞으로 이와 같은 소비행동을 오쓰카의 '이야기 소비'와 대비하는 의미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라고 부르고자 한다.  (p.96~97)


반복해서 말하자면, 데지코라는 캐릭터가 하나의 총체성을 이루지 않고, 그녀의 '커다란 눈'이나 '고양이 귀'와 같은, 오타쿠들에게 선호되는 요소들이 조율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조합되어 있다면 오타쿠는 거기에 '모에'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즈마 히로키가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통하여 주장하는 것은 그와 다를 바 없는 주장입니다.


반대로 90년대에는 원작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그 단편인 일러스트나 설정만이 단독으로 소비되고 그 단편에 소비자가 마음대로 감정이입을 강화해가는, 다른 유형의 소비행동이 대두해왔다. 이 새로운 소비행동은 오타쿠들 자신에 의해 '캐릭터 인간'으로 불리고 있다. 후술하듯이 거기에서 오타쿠들은 이야기나 메시지와는 거의 관계없이 작품의 배후에 있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하고 있다.  (p.76)

그들은 감정적인 만족을 더욱 손쉽게 달성해주는 모에 요소의 방정식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소비하며 도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발견되면 캐릭터나 이야기의 대세는 금방 변해버리고 또 여러 요소를 순열조합함으로써 얼마든지 유사한 작품이 생산되어버린다. 이 집단적이며 익명적인 작품군 속에서는 종래와 같은 작가성은 극히 작은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작품의 강도는 작가가 거기에 불어넣은 이야기=메시지가 아니라 그 속에 배치된 모에 요소와 소비자의 기호의 궁합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다.  (p.151~152)


아즈마 히로키는 요소를 그저 순열로 조합하면 이야기와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오타쿠는 거기서 자신이 선호하는 요소들을 알아서 읽어내고, 기호적인 소비를 행하는 것이죠. 그는 왜 이렇게 기묘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요? 아즈마가 규약(코드)을 무시하고 전개한 이러한 주장은 그가 사용한 구조주의적 방법론에 비추어봐도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베르나르 발레트는 구조주의적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죠.


구조주의적 방법은 일종의 연구 방법이지 철학이 아니다. 60년대부터 구조주의 방법이 일으킬 수 있었던 열광은 물론 이들의 복합적인 재능 때문이다. 해석을 목표로 하기 전 해석과 무관한 것처럼 이루어진 분석과 통합 때문이다. 복합적 체계의 분석은 단편, 소설, 대중적 이야기(* 츠베탕 토도로프, 『문학과 의미』) 혹은 연속적인 이야기(* 블라디미르 프로프, 『민담의 형태론』)에서 이루어진다. 통합은 구술이나 문자로 된 다른 총체들에서부터 구조적 반복들의 연구(레비 스트로스, 브르몽, 그레마스)이다.

구조주의는 분석 대상이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으로 축약될 수 없다는 원칙(하나의 객관적 사실이지 가정이 아닌)에서 출발하면서 의미 작용 단위들을 찾아내고자 한다. 변별적인 단위들은 변별적 기능들과 부합한다: 이들 단위는 관련된 체계 안에서 사용되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이들 단위의 본질적 특징들이 아니라 바로 조합의 법칙이다.  (p.101~102, 강조는 인용자)


(베르나르 발레트, 『소설분석 ─ 현대적 방법론과 기법』, 조성애, 동문선.)


구조주의적 방법론은 언어학의 음운론, 말하자면 음소와 이항대립, 그로 인하여 발생한 '구조'라는 관점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연구 방법입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야기와 관습을 표층과 심층의 2층구조로 나누어 보고,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인지 가능한 최소 단위인 '요소'를 발견한 것은 구조주의(혹은 구조주의를 내포하고 있던 형식주의)적 방법론을 통하여 문화 연구(서사 연구)를 행하였던 선대 연구자들의 '서사소', '신화소', '행위소' 등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오오츠카 에이지는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죠.


이쯤에서 '이야기의 구조'라는 사고방식의 성립에 관해 간단히 살펴보자. 처음 이야기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등장한 곳은 1920년대 러시아혁명 직후 러시아였다. 민속학자 블라디미르 프로프가 러시아에서 마법민담이라고 불리던 옛날이야기를 과학적으로 분류했는데, 이 옛날 이야기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략)

프로프는 민담의 과학적 분류를 위해 우선 민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찾아내고, 그 최소 단위의 조합 패턴을 통해 다시 분류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식물을 분류할 때도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것을 같은 종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꽃잎이나 암술, 수술, 줄기, 잎 등 똧의 최소 단위를 먼저 찾고, 이 단위들의 조합을 다시 분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대상물을 '최소 단위로 이루어진 구성물'로 이해하는 태도는 프로프뿐만 아니라 러시아 구성주의와 몽타주 이론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다. 즉, 레프 쿨레쇼프Lev Vladimirovich Kuleshov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의 몽타주 이론은 '컷'이라는 최소 단위로 영화를 분석하고, 그 조합을 통해 영화가 성립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단독으로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컷을 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개념이 몽타주이다.  (p.39~40)


(오오츠카 에이지, 『스토리 메이커』, 선정우, 북바이북.)


베르나르 발레트와 오오츠카 에이지가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중요한 것은 최소 단위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조합을 하는가 하는, '조합의 법칙'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라는 사고 방식에서는 바로 이 '조합의 법칙(=규약)'이 소실되어 있을 뿐더러, 최소 단위 자체를 소비하고 거기서 가치를 찾는다고 하는 기묘한 '역전'이 발생해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에서 과연 〈이야기〉는 사라졌을까


아라이 카츠야 또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함정에 빠진 탓에 논의가 연결되지 않고 끊어진, 별도의 형태로 비판이 전개되었습니다만, 여기서 그가 전개한 비판은 충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선하여 다루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아라이는 먼저, 아즈마 히로키가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본질주의란 사회구축주의(사회구성주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데올로기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소비'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사람들은 '세계관=「커다란 이야기(O)」'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모에 요소를 임의로 추출하고, 또 임의로 그 요소들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이에 따르면 '추출'이나 '구성'하는 행위의 동기는 개개인의 욕구에 바탕하는 동물적, 혹은 본능적인 것으로 여겨졌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사람들은 동물화한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 10년간 오타쿠들은 급속하게 동물화하고 있다. 그 근거로 그들의 문화소비가 커다란 이야기에 의한 의미 부여만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요소의 조합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성가신 인간관계에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모에 요소를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로 연출해주는 작품을 찾고 있는 것이다.  (p.159~160)

그러나 지금은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은 오히려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는 더이상 커다란 공감 따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다.  (p.164~165)


아즈마 히로키가 취한 본질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동물적인 욕구'에 의해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행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인간과 달리 비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즈마 히로키가 본질주의적인 관점과 정반대의 위치에 자리하는 사회구축주의적인 관점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모순입니다. 이것은 그가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타카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죠.

무라카미 타카시는 62년생으로 오타쿠라면 제1세대에 해당하며, 애니메이션이나 피규어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완전한 오타쿠가 되지 못한 오타쿠'를 자칭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DOB〉연작이나 〈S · M · P · ko2〉 연작에서 보듯, 무라카미 타카시가 오타쿠 컬쳐에서 독특한 발달을 이룬 캐릭터 디자인에 주목하여 그 특징을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강조하고 해체하고 변형함으로써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즈마는 무라카미가 오타쿠들에게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무라카미의 작업의 협력자였던 아사노 마사히코가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 유전자'가 결여되어 있다고 발언했던 것을 일례로 듭니다. 그리고 아사노 마사히코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계 작품을 '오타쿠적'이게 하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으리라 추측하죠.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다른 오타쿠들과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타카시 역시 시뮬라크르에서 '요소의 추출'을 행하는 것은 같습니다.


본래 현대미술의 비평적인 세계에서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은 '새로운 전위를 구성하기 위한 무기'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리고 필시 무라카미 또한 당초에는 오타쿠계 문화의 표층에 대해 그와 같은 '전위'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맥에서 이해하면 〈DOB〉나 〈S · M · P · ko2〉는 확실히 오타쿠적인 디자인이 가진 가장 과격하면서도 무근거한 부분을 추출해 순수화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며 그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p.114)


다만 다른 점은, 무라카미의 실험은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문에 시뮬라크르에서 "모에 요소를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아즈마 히로키는 무라카미의 실험이 "불완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진단하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을 이야기하며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처리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상 오타쿠들은 서로 간에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시뮬라크르에서 모에 요소를 파악하는 공동의 능력을 갖추는, 일종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포스트모던의 서브컬쳐 소비는 단순히 개개인의 '동물적인 욕구', '본능적인 감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창작과 소비의 순환 작용을 통하여, 공동체의 공동성을 지향하는, 사회적인 구축물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이터베이스가 (장르를 향유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암시하는) '장르적 관습'의 일부분인 이상 당연한 결론으로, 2차창작을 통한 개개의 작품군이 (본래의 뜻과 달라졌다고 지적되기도 하는) '장르'를 이루는 것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인'이라 불리는 공동체의 성원들이 별 수익을 거둘 수 없음에도(때로는 적자를 감수하며) 2차창작품을 발표 및 판매하는 '온리전'과 같은 행사를 열어, 커뮤니케이션의 장소를 만드는 것. 그리고 2차창작품의 판매와 구매를 통하여 애정과 열기를 공유하는 '공감'의 존재. 이것들은 오타쿠가 비오타쿠(리얼충)와 달리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말하는) 콘텍트보다 콘텐츠를 중시한 소통을 행하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접속의 밀도'를 중시하는 부류와 '전언(傳言)의 밀도'를 중시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설명과 달리, 오타쿠들에게 사회성이 존재하고, 데이터베이스와 사람들의 욕구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과연 오오츠카가 말했던 「커다란 이야기(O)」=〈작은 이야기(L)〉가 포스트모던이 되었다고 해서 사라졌을까 하는 의혹이 부상해오는 것이죠. 그리고 아라이 카츠야는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합니다.


오오츠카는 아이들과 오타쿠(이 경우는 동인지의 동료나 코믹마켓 이벤트 참가자)가 이와 같은 '이야기 소비'에 향하게 되는 동기를 가부키 · 조루리의 극작 용어인 '세계'와 '취향'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세계'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 · 사건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등장인물의 배역명이나 그 성격, 인물 간의 상호 관계, 기본적인 줄거리, 각색되어야 할 기본적인 국면이나 전개 등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작자는 이들 세계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새롭게 고안한 '취향'을 각색한다. 그리고 이 때 '세계'가 세계관, 바꿔 말해서 「커다란 이야기」에, 취향이 「작은 이야기」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아이나 오타쿠들은 '세계'=「커다란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스스로가 '세계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同 : 32)인 것을 확인한다. 또 한편으론 '취향'=「작은 이야기」, 즉  이야기의 2차 창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스스로가 개성적인 존재임을 내세운다. 이러한 오오츠카의 관점을 가져다 본다면 '데이터베이스 소비'란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 패턴이며, 또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 획득 수단임에 변함은 없고, 바꿔 말하자면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p.182~183)


(아라이 카츠야, 『우리나라에서의〈이야기론〉의 수용』, 칸토가쿠인 대학 문학부 기요 제117호.)


아라이 카츠야는 아즈마 히로키가 오오츠카의 『이야기 소비론』을 잘못 원용하고 있다며 문제점을 제기합니다. 오오츠카가 해당 저작에서 이미 '데이터베이스 소비'적인 관점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다만 저는 아라이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아즈마 히로키를 충분히 세심하게 읽지 못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1) 앞서 언급했듯, 아즈마 히로키는 『이야기 소비론』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적인 내용을 읽어냅니다.

다만 아즈마의 문제는, 오오츠카의 시각을 과도기적인 것으로 위치를 재설정하고 수정하여 읽어냈다는 데 있었죠. 다시 말하자면, 오오츠카와 아즈마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오직 〈이야기(L)〉의 유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즈마가 오오츠카를 '이제는 낡은 것'으로 읽어낼 수 있던 배경은 오오츠카의 「커다란 이야기(O)」를 리오타르의〈커다란 이야기(L)〉와 같게 읽어내는 언어적 트릭에 있었습니다. 즉, '커다란 이야기'에서 '커다란 비이야기'로 시대는 이행하였으며, 오오츠카의 주장은 그 사이에 있던 '과도기'적인 현상에 불과했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아즈마의 이러한 주장은 아라이 본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오오츠카의 「커다란 이야기(O)」가 실상 〈작은 이야기(L)〉이며, 데이터베이스와 「작은 이야기(O)」는 장르적 관습과 개별 작품과의 관계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완전히 파탄하게 됩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오오츠카의 주장을 '과도기'로 읽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역사적 필연이자 귀결로 읽어낼 수 있던 기본 전제가 무너져내리는 것이죠.

또한 우리는 이 사실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를 은폐해야 했던 이유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기까지의 설명을 따라오셨다면 이미 생각이 닿으셨겠죠. 그렇습니다. 반대로 말해서, 근대의 서브컬쳐 소비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이 모순이 아닌 경우가 존재합니다. 오타쿠 컬쳐가 탄생부터 현재까지 〈작은 이야기(L)〉였던 경우, 근대에 관하여 다루지 않은 것은 아무런 모순도 아닌 것이죠. 즉, 아즈마 히로키는 〈커다란 이야기(L)〉에 의한 근대 서브컬쳐 소비가 애초부터 성립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저 그 내용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오타쿠 컬쳐가 〈작은 이야기(L)〉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요. 포스트모던에서는 〈이야기(L)〉가 소실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사회성을 잃고 '동물화'한다. 그의 그런 주장은 결국 '날조된 근거'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한 '동물화'에는 〈이야기(L)〉의 소실이라는 전제하에 이뤄진 '사회성의 결여'라는 측면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최소 단위(=모에 요소)'의 소비라는 측면이 함께 병존합니다. 물론 '사회성의 결여'가 허구라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이야기'에 대한 언어적 트릭 역시 발각됨으로써 (작은) 이야기를 소비하지 않고, '최소 단위의 소비'를 행한다는 주장은 근거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앞서 논의한 바대로, 구조주의적 방법론은 하나의 연구 방법이지 그 자체로는 철학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즈마 히로키는 구조주의의 자장 아래에 있던 다른 이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요? 그는 무엇 때문에 단순한 방법론에 사상적인 색채를 입혀 극단적인 언설로 치닫게 된 것일까요?



《트릭스터 ─ 아즈마 히로키 (06)》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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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은 또한 아라이 카츠야 역시도 오오츠카의 「커다란 이야기」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일정 부분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데이터베이스가 장르적 관습이란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이야기론〉의 연장선으로 읽어내며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2) 여기서는 논하지 못했지만, 코드와 데이터베이스는 사실 관습과도 떼어놓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관습은 오히려 두 가지 기관이 운동함에 따라 퇴적되는 부산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게재될 내용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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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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